울주문화원

석남송석하선생

베로.경 2011. 6. 27. 17:55



▶[인물] 한국산악회 초대 회장 석남 송석하 (1904~1948) 석남(石南) 송석하(宋錫夏) 송석하의 호는 석남(石南)이며, 경남 울주군 상북면 양등리에서 한말 궁내부 시종부경(侍從副卿)을 지낸 부친 은진 송(宋)씨 태관(台觀)과 모친 경주 최(崔)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상북면 양등리에서 태어나다 1904년 10월 11일, 한국 민속학계의 가계도를 새로 그리고, 문화민족주의란 신조어를 낳게 될 아이가 태어났다. 완연한 가을, 무르익는 결실의 계절에 태어난 그 아이가 아직 수확기를 맞기에는 턱없이 연륜이 짧았던 민속학에 매진하게 된 것 은 어쩌면 시대적 아이러니에 가깝다. 그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지 않았던들, 그리고 관동대지진이라는 경악스런 사태를 맞지 않았던들 이 만석군 집안의 자제는 식민지 조국의 현실을 쉽게 깨닫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울주구 상북면 양등리. 막 영글어 가는 감나무 둥치를 바라보며 곧 태어날 자식이 사내일지 여아일지를 생각했을 그의 부친 송태관은 한말 궁내부 시종원 시종부경(侍從副卿)을 지낸 사람이었다. 토지와 농산물을 바탕으로 한 전형적 인 봉건적 부호였던 부친 송태관은 나라가 패망의 길로 급속하게 달리던 질곡의 시기에 맏아들 석하를 보게 되었다. 어린 석하의 총명한 눈빛에서 보았을 시대의 아픔을 생각하면서 송태관에게는 기쁨보다 비애가 서렸을 것이다.

 

▶유학 시절 만난 관동대지진 송석하는 울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열네 살 때 오늘날 부산상고의 전신인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했다. 명문으로 이름이 높던 학교에 어린 나이로 합격한 것은 송석하의 학문적 능력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3년간의 보통 학교 학업을 마친 1920년, 그는 일본의 동경상과대학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가계의 빈부 차이를 넘어 식민 지 조선인이 성장할 수 있는 길은 본국 일본(?)으로 가는 길 뿐이었다고 할 때, 유학으로 마음을 정한 것은 어쩌면 당연 한 일이었다. 부친 송태관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총명한 아들이 상과대학에서 치부(治富)의 기술을 배워 오길 바랐던 것 일까, 아니면 식민지 조국을 일으켜 세울 경제력을 키워 낼 인재가 되길 바랐던 것일까. 그러나 송석하는 학문적 바탕을 채 쌓지도 못한 채 1923년 귀국하게 된다. 그리고 관부 연락선을 타기 직전, 일본땅에 서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순박한 조선인들이 참혹하게 죽어가는 모습이었다. 때로 턱벼가 짓눌린 채로, 때로 내장 을 다 드러낸 채 생목숨이 아퀴져, 또한 때로 머리를 풀어 헤친 임산부의 등줄기로 날 선 죽창날이 선연히 그어진 채로 죽어 나자빠진 시체들. 스무 살 송석하의 눈에 비친 이 처연한 조선인 학살의 모습은 선진 일본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마귀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말 그대로 복마전을 목격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릴없이 연락선에 몸을 싣는 일이었다. 온나라를 돌며 민속극 연구에 매달리다 고국에 돌아 왔지만, 바로 눈 앞에서 목도한 민족학살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민족과 국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심했다. 그러다 마침내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민속. 가열한 외세의 침탈 속에서 조선 의 체취가 밴 우리의 민속은 완연히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놀이와 우리의 인형극, 우리의 굿과 우리의 소리가 사라지고 있었다. 조선인의 삶과 역사가 석류알처럼 박힌 우리의 민속이 사라지는 것은 조선 정신의 실종이자, 국권의 상 실을 넘어 민족성의 파멸로 느껴졌다. 비록 그가 일본에서 공부한 경제학의 힘을 빌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재주와 역할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 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얻게 된 것은 수천 년 이어져 내려온 '우리의 것' 그 자체다. 1929년 송석하는 「조선의 인형지거」를 『민속예술』지에 발표한다. 고국에 돌아와 발견한 우리 민속에 대한 관심이 최 초로 학문적 의상을 입은 것이다. 이 글을 시작으로 1930년대 전기간은 물론이고 작고하기 직전까지 도합 86편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논문을 발표한다. 오로지 우리 민속에 대한 연구 성과가 그 지면을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그의 고향인 울산 지역에 남아 있던 '처용무'와 탈을 연구하고 수집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우리의 민속극을 연구했다. 그 의 뜨거운 관심과 노력 덕분에 '동래 야유' '오광대' '양주 별산대' '봉산탈춤' '인형극' '안성 남사당패' '과천 육흩덩이' '아현 본산대' 등이 우리 민속사의 자산으로 남을 수 있었다.

 

▶민속학회와 민속학회지 『조선민속(朝鮮民俗)』 끝없는 답사와 연구의 와중에도, 민속학 연구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각자의 연구 성과를 공유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일제 시대의 많은 연구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영역에 은둔하거나 특정 이념에 치우쳐 분파적인 조직을 형성하지 않고, 광범위한 의견 개진을 통해 내실있는 학회를 건설한 것은 동료 학자 손진태를 비롯해 오로지 열정으로 넘쳤던 젊은 학자들의 공이다. 대표로 취임한 송석하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한다. 그리하여 국문학이나 사학, 인류학의 주변 에서 부수적 역할로 인식돼던 민속학이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학문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한 국난의 시기에 파편적인 연구로 그칠 위험이 많았던 학술적 성과가 온전히 살아 남을 수 있었다. 특기할 만한 사례로, 송석하는 당시로서는 벅찬 일이었을 사진 촬영을 통한 기록 보존에 심혈을 기울인 것을 포함해, 외 국인의 촬영기로 영상 자료까지 만들어 유럽에 알리기도 했다. 이를 통해 그의 시야가 단지 국내의 범주를 넘어 세계를 향해 '열린 의식'을 지니고 있음도 확인된다. 학회 활동과 지속적인 학회지 발간을 주도하는 동안에도1934년에는 조윤제, 유홍열, 김상기, 손진태, 이병기, 이병도, 이 상백 등 이름만 들어도 우리 현대사의 한 장을 보는 듯한 인물들을 막라해 '진단학회'를 창립한다. 송석하는 위원장겸 재 무 담당자로 취임해 정력적인 활동을 펼친다.

 

▶1남 1녀의 아버지로 영면하다 어려웠던 망국의 시절을 의연히 인내하고 해방이 되자, 당년 11월 8일 필생의 연구 성과를 한 자리에 모아 최초로 국립민 족박물관을 설립한다. 관장으로 취임한 그는 이밖에도 조선산악회 창립을 비롯해, 한라산 태백산 오대산 울릉도 등지로 나가 국토구명사업을 펼친다. 엄혹한 세월을 견뎌냈지만, 해방이 되었다고 해서 민족과 국토의 '구원'마저 달성된 것은 아 닌 터였다. 평생을 떠돌며 현장 답사와 자료 수집에 봉사했던 석남 송석하는 한국 민속학계의 시원(始原)을 이루어 냈지만, 1948년 45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다. 슬하에 1남 1녀를 둔 한 평범한 아버지로서의 영면. 그가 서거하자 많은 동료들과 후학들은 채 마무리 되지 못한 그의 학문적 목표를 아쉽게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묘를 세웠다가,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은 뒤 충남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 서풍농장 중앙산록으로 이장했다.

   

                                                                                                                ---한국산악회 자료실에서 옮김--- 

 

****************************************************************************************************************

송석하 (민속학자)

송석하(宋錫夏, 1904년 10월 11일 - 1948년 8월 5일)는 한국의 민속학자로, 호는 석남(石南), 경상남도 울주군(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출신이다. 그는 1920년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으며 같은 해에 도쿄 상과 대학에 입학했으나 1923년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자 귀국했다.

그는 1932년조선민속학회의 발기인 가운데 하나로 참가했으며 1933년 1월에 자신의 산재를 털어 학회지 《조선민속》을 창간했다. 1934년에는 진단학회의 발기인 가운데 하나로 참여했으며 광복 이후 1945년 11월 8일국립민속박물관을 설립했다. 1996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으며 주요 저서로 《한국민속고》가 있다.

                                                                                        ---위키백과사전에서---